가나 혼인 잔치에서 신랑과 신부는 누구일까? – 요한복음 다섯번째 글
표적의 목적과 요한복음의 구조
요한복음은 기록된 목적과 설명 구조가 명확합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번에 표적이 등장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1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설명 구조와 같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표적으로 인해 오직 제자들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고, 하인들은 알았지만 믿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표적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표적으로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생명의 세 측면과 가나 혼인 잔치의 의미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이름을 통해 얻는 ‘생명’은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탄생’으로서의 생명,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함께 거함으로 현재 살아가는 ‘유지’로서의 생명, 그리고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생’으로서의 생명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장에서 18장에서 이 세 가지 생명의 측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을 통해서 얻는 생명은 ‘유지’로서의 생명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나 혼인 잔치가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 누가 누구인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중요한 단서는 포도주를 준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준비하는 사람은 신랑입니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제공하심으로써 실질적으로 신랑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3:29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표현한 것과 연결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그렇다면 신부는 누구일까요?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신부는 개인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모인 하나의 사람입니다. 호세아서 2:14-20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한 신부로 표현하며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1:2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너희”는 믿음을 가진 사람 전체를 가리키며 이들을 “한 처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진 자신이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교회 전체를 한 신부로 보고 있습니다. 이 관점이 우리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한 처녀”라는 인식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때’와 결혼의 성취
예수님이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요한복음 2:4)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나의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주석서에는 ‘이 때’를 떠들썩한 인간의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을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로 채우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로 봅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있게 살펴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준비하는 신랑의 역할을 하신 것으로 보면 신랑인 그리스도와 결혼이 이루어질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25:6-8과 요한계시록 21:2-6은 미래에 있을 완전한 혼인 잔치를 묘사합니다.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요한계시록에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26:29에서 예수님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가나 혼인 잔치의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가 미래에 있을 완전한 생명의 잔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결혼: 바울 서신(로마서, 에베소서)의 관점
그러나 로마서 7:1-4와 에베소서 5:22-32를 보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은 계시록에서 예언하고 있는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현실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7:4에서 바울은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결혼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을 설명합니다. 이는 결혼의 목적이 신부를 변화시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계시록에 기록된 새하늘새땅에서 이뤄지는 혼인잔치와 바울 서신에서 설명하는 혼인 잔치와는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이 결혼의 때에 눈물을 씻기시고 슬픔을 제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신부를 거룩하게 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직접 생명을 주시고 신부를 변화시키심을 보여줍니다.
가나 혼인 잔치와 현재의 생명
가나 혼인 잔치는 단순한 첫 표적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서 7-8장에서 제시하는 결혼의 관점으로 볼 때, 이 표적은 현재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유지로서의 생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나 혼인 잔치는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
로마서 7:4에서 바울은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결혼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로마서 8:10-11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시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7장 4절의 ‘결혼해서’도 나중에 결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미 결혼한 것이냐? 처음 그리스도인이 생겨났을 때, 그 ‘신부’가 어린 시절에 결혼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신부는 어느 정도 성장해서 결혼할 시점이 되어야 결혼합니다. 그 전에 ‘한 처녀’로 드러나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안 됐다고 봐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한 처녀’라고 인식하고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에베소서 5장에 나온 것처럼 결혼해서 진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나타나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한 몸( 한 육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신랑이 주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처음 예수님 믿었을 때의 탄생으로서 생명이 아니고, 영생해서 그 어린 양의 아내와 신부와 그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닌, 지금 살아가는 시점에 생명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신랑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설명이 안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구약과 계시록과 바울 서신을 보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어떤 교훈을 받을 것인가? 거기서 설명하는 생명이 무엇인가? 지금 그리스도와 교회가 결혼해서 한 몸이 이루어지면, 거기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루어진다는 약속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