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을 공부할 때 계속 초점을 두게 되는 중요한 개념은 바로 ‘이름’입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정체성과 본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성경이 증언하는 중심이 예수님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히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라는 공식만이 아니라,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생명 사이에는 ‘이름’이라는 중요한 중간 단계가 존재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으로, 예수님의 여러 이름(정체성)을 이해하는 과정이 생명을 얻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흔히 하나의 이름처럼 사용하지만, 사실 이는 두 가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분의 고유 이름입니다. 마치 우리가 ‘철수’, ‘영희’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분의 실제 이름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는 그의 지위나 직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 구별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예수가 바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표적들을 선별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그리스도)가 어떤 표적을 행할지 예언되어 있었고, 예수님은 그 기준에 정확히 부합하는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구절의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는 것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통해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배경에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교리가 기독교의 기본 원리로 굳게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세 교회에서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는데,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주장은 매우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을 구분하여 후자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마음(Heart)을 지식을 받아드리는 곳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영어의 ‘Heart’가 심장을 의미하지만, 믿음과 감정은 실제로 뇌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심장 이식을 받은 사람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심장에 있다는 관념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습니다.
감정, 기억, 판단과 같은 마음의 작용은 모두 뇌에서 일어나며, 단지 가슴에서 느껴질 뿐입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표현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라고 했지만, 요한복음은 실제로 ‘마음’보다 ‘예수님의 이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관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믿는다는 표현보다는 ‘연구’한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성경’이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 즉 지금의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이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고, 구약성경에서 설명한 그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여기서 율법은 모세 오경을 말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것은 모세 오경 외의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4-47절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명확하게 구약성경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 부활,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을 예언했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인 구약성경이 ‘나’의 얘기라고 하셨지만, 구약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대부분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율법, 예언, 시가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 그리스도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적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출애굽과 광야 생활, 가나안 정착, 왕국의 흥망성쇠, 선지자들의 예언 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을 단순히 예수님 이야기로 인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름을 통해 ‘생명’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관점에서는 구약성경이 ‘점’과 같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인용될 때 방향이 정해집니다. 그래서 구약은 ‘문제지’이고 신약은 ‘답지’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이 성경을 이루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이름을 통해 ‘생명’으로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이런 내용을 알면 알수록 은혜와 진리가 더 충만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양하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그 결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준 것이며, 결국 둘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같은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더 발전시켜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과 그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전체가 합하여 한 명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다양하고 풍부한 이름과 별칭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예수님은 ‘말씀'(로고스)으로 소개되며, 이어서 ‘생명’, ‘빛’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거니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등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자신도 일련의 ‘나는 ~이다'(I am) 선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예수님의 본질적 정체성과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는 이러한 이름들이 단순히 예수님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 이름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여러 이름이 나오는데, 그중 일부는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정체성을 갖게 되는 특별한 이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전, 그리스도와 같은 이름들은 우리가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과 동일시되는 경우입니다. 이와 달리 ‘어린 양’이나 ‘말씀’과 같은 이름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만 우리가 그 이름과 동일해지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개념을 더 발전시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하나가 됨을 설명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함께 연결되어 주 안에서 한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퉁잇돌이 되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건물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고만 했지만, 바울은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어 전체가 하나의 성전을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살아난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를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표현하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 ‘한 새 사람’, ‘한 몸’이 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자들끼리 잘 지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향해 사는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자신에 관해 증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적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들 속에 그리스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개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성전 개념도 마찬가지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그 진정한 의미가 새롭게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의 새로운 의미로 설명하시면서 더 큰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주춧돌이 되어 많은 성전 재료들이 모여 전체가 하나의 성전을 이루게 됩니다. 이를 통해 거룩함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이 내 이야기다”라고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 이야기 속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하나가 될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난다고 했는데,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말씀하실 때는 이후에 형성될 더 큰 성전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신랑임을 밝히실 때도 신부와 하나가 되어 전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해 살게 되는 비전을 담고 계셨습니다.
구약성경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약성경 전체가 나에 대해서 말을 했다’라는 구절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도 있지만,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 예수’하고 ‘우리’가 하나가 되는 그 ‘그리스도’ 개념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 가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이름을 가지는 것이 생겨 우리가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로 시작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고 여러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죽게 된 어린아이를 살리고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는 등의 표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증거가 자신의 말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증언, 자신이 행한 표적, 그리고 구약성경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언한다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은 구약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분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증언했다고 말씀하시며 그 증언이 구약성경에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증언은 세례 요한의 증언이나 예수님이 행한 표적보다 더 큰 증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 하나 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으나, 이는 육신으로 된 아들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한 몸, 한 아들이 되어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시며 하나 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도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계속하시는데,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하나가 되면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면 하나님을 향해 지금 살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탄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의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이 내 이야기다’라고 하신 것은 구약성경에 설명된 아들과 몸의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실현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모두 포함되며, 특히 이방인들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생명의 복음의 시작점을 알리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온전히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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