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두 장면은 불과 하루 차이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각각 매우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고, 그 다음날에는 단순히 “거니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는 이 표현의 차이는, 사실 예수님의 두 가지 중요한 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구원자로서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서의 모습입니다.
이 두 표현의 차이를 통해,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구약의 출애굽 사건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충격적인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며 자신들의 죄를 속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월절에는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는 출애굽 때 장자들을 죽음에서 구원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표현은 이 모든 구약 성경에 나타난 제사 제도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놀라운 계시였습니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수많은 제사와 그 희생 제물들은 모두 예수님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표현입니다. 기존의 구약 성경의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만을 다룬 것과 달리,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죄를 해결하실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됩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 1장에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장에서는 빌립이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해답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의 사건은 첫번째 장면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만 말했습니다. 이전날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표현이 빠진 것입니다. 대신 새로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선생님, 어디에 머무시나요?”라고 여쭈었고,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초대는 단순한 장소의 안내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과 함께 지냈는데, 요한복음은 특별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라고 시간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날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거처를 확인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그분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과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거하다’라는 말은 원어로 ‘장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셨던 것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성막이나 성전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그 본질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여러 차례 이 “I A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특히 요한복음 8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자신이 바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오래 살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단순한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는 것임을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신성 모독을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것은 단순한 해방의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깊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는 시내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셋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29장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모세가 없는 틈에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드는 사건으로 인해 이 계획이 위협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인해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셨고, 결국 성막을 통해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의 삶에 직접 관여하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였고, 이는 후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완전히 실현됩니다.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만났지만, 대부분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환상으로 나를 보이거나 꿈으로 말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출애굽기 33-34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모세를 바위 틈에 숨기시고, 자신의 영광이 지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비록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분의 뒷모습을 보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I AM)을 통해 항상 존재하는 분임을 알려주셨다는 점입니다.
이 경험은 모세 개인의 특별한 경험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은 모세가 없어질 영광을 숨기기 위해서 얼굴에 수건을 쓴 것과 같지 않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며 그 형상으로 변화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세의 특별한 경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보편적 경험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은 매우 특별한 의미로 나타납니다. 계시록 5장에서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 등장하는데, 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놀랍게도 이 어린 양은 연약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한가운데 서 계시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강력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어린 양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 이후로” 이 생명책이 존재해 왔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역사의 한 시점에 등장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획하시고 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어린 양은 이 생명책을 통해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인 21장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 나옵니다. 3절과 4절에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 이는 출애굽 때부터 하나님이 원하셨던 ‘함께 거함’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더 이상 죽음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입체적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속죄 제물로서의 어린 양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십니다. 이는 마치 두 개의 렌즈를 통해 하나의 대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렌즈만으로는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단지 죄 용서를 해주시는 분으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다음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표현은 우리 죄를 지고 가셔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는 그 어린 양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있는 그 하나님이 이미 출애굽기에서 ‘모습’으로 모세에게, ‘이름’으로 나타났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고, 우리와 함께 거해서, 그 함께 거하는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 엄청난 생명력을 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라는 분이 누구냐는 것이 중요한 초점입니다. ‘누구냐’라고 설명되는 ‘I AM’이라는 그 이름,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설명되는 이 부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한복음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냐’를 설명하는 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그다음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 그렇게 불리운 그 이름을 근거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핵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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