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표적, 진짜 배고픔과 진짜 음식 이야기(요한복음 6장)
5천 명을 먹인 놀라운 기적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자,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사람들이 따라온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유대인의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앉아 계실 때, 큰 무리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제자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은 당황했습니다. “각 사람이 조금씩만 받아도 200데나리온(당시 노동자 200일치 임금)의 떡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나섰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앉게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잔디가 많았고, 앉은 사람의 수가 남자만 5천 명 정도였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고, 물고기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고,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예수님의 회피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다!”
이것은 구약 시대 모세가 예언했던 말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라고 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바로 그 선지자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들의 반응이 이해가 됩니다. 모세 시절에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먹고살았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하늘에서 음식이 내려왔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만 명 이상을 먹이셨습니다. 만나보다 훨씬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분이 우리 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이렇게 먹여주시면 우리는 일하지 않아도 배부르게 살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왜일까요? 분명히 예수님은 그리스도(왕)이시고, 사람들의 인정도 틀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경험
저물어서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어두웠는데 예수님은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약 5-6km) 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자, 제자들이 기뻐서 예수님을 배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했습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은 그 무리들이 보았지만,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은 제자들만 보았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두 가지 기적을 모두 본 셈입니다.
다시 만난 사람들의 질문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배는 한 척밖에 없었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않고 제자들만 갔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바다 건너편에 계신 걸까요?
다른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물었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그들은 아마 다시 만난 것이 반가웠을 것입니다. ‘어제 그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분을 다시 만났으니, 오늘도 뭔가 좋은 일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겠죠.
예수님의 직설적인 지적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매몰차고 직설적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말씀이 이상하지 않나요? 분명히 표적(기적)으로 떡을 먹고 배불렀는데, 왜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고 하실까요?
여기에 요한복음의 깊은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기적을 행하신 목적과 사람들이 받아들인 결과가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려고”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고)
사람들의 반응: “우리를 먹여주는 왕으로 모시려고”
썩는 음식과 영원한 음식의 차이
예수님은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여기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우리말로는 ‘영생하는 양식’ 같지만, 원래 의미는 ‘영생을 주도록 항상 존재하는 양식’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는 썩는 음식입니다. 아무리 기적적으로 많은 사람을 먹였다 해도, 그 자체는 썩어 없어질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예수님의 답은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만나 이야기의 재등장
그러자 사람들이 또 다른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어제 한 번 먹여주신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조상들처럼 40년 동안 계속 먹여주세요”라는 요구였습니다. 생각해보면 5천 명도 큰 숫자지만, 광야에서는 200만 명을 40년 동안 먹였으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내가 바로 그 생명의 떡이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그들은 여전히 매일 주어지는 음식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나처럼 매일 떨어지는 음식, 하지만 더 맛있고 다양한 음식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물리적인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영생의 관계
예수님은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결론이 아니라, 그 과정입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느냐?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만나의 진짜 의미
많은 사람들이 만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구약 신명기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보면 만나에 대한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결국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도 죽는다는 말이 되어 모순입니다.
실제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목적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만나 자체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만나의 특징을 보면 이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만나는 하루도 보관할 수 없어서 바로 썩어버렸습니다. 대표적인 ‘썩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반발
예수님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근거렸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것은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어떤 중요한 사실이 나오면 그 내용 자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출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생명의 떡인지 아닌지는 따지지 않고, “네가 하늘에서 왔다고? 우리가 너 부모 다 아는데?”라며 출신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2장에서 무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것은 시편 102편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히브리서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항상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의 의미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썩을’의 반대는 ‘영생’이 아니라 ‘있는’입니다. 즉, ‘항상 존재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영생하는 양식이다”가 아니라 “나는 영생을 주도록 항상 존재하는 양식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는 썩는 음식이었습니다. 그것들로 기적을 행해서 사람들을 배부르게 했지만, 그 음식 자체는 썩어 없어질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항상 존재하는 진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과정의 중요성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우리는 종종 결론만 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결론만 외우면 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축구를 뭐 하러 봐? 결과만 알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어떤 전술을 썼는지, 선수들이 어떻게 플레이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골이 나왔는지가 더 흥미롭습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결론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습관의 문제
사람들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의존하려는 습관입니다.유월절에 문설주에 피를 발랐을 때, 그 피를 보면 넘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피’ 자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피를 보면 넘어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는데, 피 자체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 올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놋뱀 자체를 거의 천 년 동안 섬겼습니다. 나중에 히스기야 왕이 그것을 부수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만나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진짜 메시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셨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나는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단순히 배만 부르게 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 그 물고기와 빵은 썩어 없어질 것들이지만, 나는 항상 존재하는 진짜 양식이다.”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놓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힘입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현대적 적용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우리도 종종 눈앞의 필요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건강, 돈, 성공, 행복 등 당장 필요한 것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우리 마음의 진짜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짜 갈증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인생의 의미, 진정한 만족, 영원한 평안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과정을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믿으면 된다”는 결론만이 아니라,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