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는 많이 들어봤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보통 ‘육신’이나 ‘몸’을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죄를 짓게 하고, 욕심을 부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실제로 성경의 많은 곳에서도 육신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몸을 입으실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그 몸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물질적인 것은 나쁘고 영적인 것만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요한복음은 이런 생각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두 가지 놀라운 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어느 날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백성들을 먹이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인 것처럼 말이죠.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선지자다!” 그들이 말한 선지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흥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그들을 피해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려는 일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걸으신 기적
그날 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노를 젓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인 줄 알았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도 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내니”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원래 그리스어로는 “I AM(내가 바로 그다)”이라는 매우 특별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그냥 “나다”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I AM”이라는 이름은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가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이 너희를 구하러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고 답하시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이르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물 위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I AM”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놀라운 고백
사람들이 떠나간 이유
이 두 기적 후에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한다는 거야?” 유대인들은 피를 먹는 것을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시니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너무 어렵다.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라며 떠나갔습니다. 이들은 오병이어 기적을 직접 보고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도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고백
많은 제자들이 떠나간 후, 예수님이 남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요한복음에서만 “거룩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왜 요한복음에서만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는 요한복음이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단순히 메시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그분의 육신 자체가 거룩하며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자”의 진짜 의미
구약에서 말하는 거룩하신 분
“거룩하신 자”라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구약을 살펴봐야 합니다. 구약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분명히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Holy One”이라고 번역하는데, 어떤 번역본에서는 대문자로 “Holy One”이라고 써서 이것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몸
나중에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다시 이 말을 사용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영혼과 육신을 구별해서 설명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음부(죽은 자들이 가는 곳)에 버려지지 않았고, 육신은 썩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떠나고 몸은 썩어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했습니다.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여기서 “거룩한 자”와 “육신”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거룩한 육신이 썩지 않고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왜 몸이 썩지 않아야 할까요?
영원히 살아계셔야 하는 이유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그분의 몸이 썩어 없어졌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항상 존재하는” 몸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항상 있는 양식”이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배고픔을 달래주는 음식이 아니라 영원히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썩지 않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여 살아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어서 끝이었다면, 그분의 희생은 과거의 사건으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 몸과는 다른 몸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몸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같은 ‘육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그 몸으로, 죄가 없고 썩지 않으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몸입니다. 이 몸은 본질적으로 거룩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몸입니다. 죄가 있고 언젠가는 죽을 몸이지만,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거룩해질 수 있는 몸입니다. 이 몸은 현재는 불완전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읽을 때 많은 혼란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육신과 우리의 죄 있는 육신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거든요.
놀라운 비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
부부가 하나 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비밀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그리스도)과 교회(믿는 사람들)도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이것을 “큰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이 먼 미래에, 예를 들어 천국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것은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혈과 육”을 가진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현재 이 땅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거룩해지는 과정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가 된 우리의 몸은 어떻게 될까요? 에베소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과 하나가 된 우리의 몸에는 여전히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죄를 처리하시고 우리를 점점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이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정입니다.
물론 우리 몸은 언젠가 죽고 썩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가 올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보여준 모형
성막에서 하나님과 만나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성막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이 거룩함이 제한적이었습니다. 성막의 지성소와 성소, 제단, 그리고 제사장들만 특별히 거룩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었고,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성전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모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제사장이 됩니다. 구약시대에 성막과 제사장으로 나뉘어 있던 역할이 신약시대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통합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성막이 예표했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시며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실현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육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창세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래 ‘몸’이나 ‘살’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몸은 선한 것이었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에는 아무런 죄나 부정함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을 설명할 때, 바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이 창세기 6장 이후의 타락한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2장의 순수한 연합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언제부터 몸이 문제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몸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창세기 6장을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맘대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몸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떠나자 육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몸은 죄를 짓고 욕심을 부리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육신’의 부정적 의미가 시작된 지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육신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결과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다시 연합하면 육신도 본래의 선한 목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기 쉬운 예수님의 말씀
“육은 무익하다”는 말의 진짜 뜻
제자들이 “인자의 살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나누어서 영은 좋고 육은 나쁘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 말씀의 맥락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한 말은 영적인 말이니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과 육”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 말한 그 “영과 육”처럼,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상태와 하나님을 떠난 육신적 상태를 구별한 것입니다.
세 가지를 구별해서 생각하기
요한복음을 읽을 때 세 가지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구별을 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때 심각한 혼란이 생깁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거룩한 몸으로, 죄가 없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몸입니다. 이 몸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에서 말하는 그 육신이며, 썩지 않고 부활하여 영원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의 몸입니다. 죄가 있지만 점점 거룩해져 가는 몸으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된 상태의 몸입니다. 이 몸은 현재는 불완전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몸입니다. 죄에 빠져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몸으로, 창세기 6장 이후의 타락한 상태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육은 무익하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상태의 육신적 판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으면, 예를 들어 예수님의 거룩한 육신과 우리의 죄 있는 육신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이 육신 자체를 부정하셨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부활의 의미
영의 부활과 육신의 부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두 가지 측면을 구별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활, 즉 거듭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선포되신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도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했는데, 이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부활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육신이 썩지 않고 부활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두 가지 측면
이 두 가지 부활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먼저 육으로 태어나고, 그 다음에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때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이며, 이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으로 먼저 태어나야 영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육신 자체가 나쁘다면 왜 굳이 육으로 먼저 태어나야 할까요? 이는 육신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래의 영광스러운 변화
썩지 않는 몸으로의 변화
우리의 현재 몸은 죄가 있고 언젠가는 죽을 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미래에 있을 하나의 비밀을 제시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현재 우리가 가진 “혈과 육”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썩지 않는 몸”,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우리의 몸도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 사이의 의미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몸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미래에 변화될 것이라면 현재의 몸은 그냥 참고 견뎌야 할 짐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이 말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된 육신이 이 땅에서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큰 비밀입니다.
로마서가 보여주는 해답
죄를 정죄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8장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예수님 개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문맥상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된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 육신에는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를 정죄하십니다. “정죄한다”는 것은 그 죄가 나쁘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의 정체성
골로새서는 이를 “새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 “새 사람”은 개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된 전체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 새 사람 안에서는 모든 인종적, 사회적 구별이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심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서신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된”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강조하고, 후자는 그 성육신하신 분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연합을 강조합니다.
결론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서 우리에게 두 가지 차원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생명: 영원한 생명
첫째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썩지 않는 거룩한 육신을 통해 우리도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죽지 않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 생명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생명: 현재의 거룩한 생명
둘째는 지금 이 땅에서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 우리의 몸이 점점 거룩해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 경험할 수 있는 실제적인 생명입니다.
많은 사람이 첫 번째 생명(영생)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만 강조하는 것이죠.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생명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여러 층위의 진리를 동시에 깨달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바로 구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며 “I AM”이라고 하신 그분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그분의 육신이 단순한 인간의 몸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육신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셋째, 자신들도 그 거룩하신 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누구인지만 안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육신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현재의 삶에서는 별다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진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셔서, 우리의 육신도 거룩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생명”의 참된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