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 왜 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생을 말하지 않으셨을까? – 요한복음 14번째 글

요한복음 7장은 ‘초막절’이라는 유대인의 중요한 명절을 배경으로 한다. 이 명절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데, 예수님은 명절 중간쯤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의 동생들이 제안했다. “형님도 이번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세요.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예수님은 처음에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예수님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올라가셨다. 그리고 명절 중간이 되어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와 그 의미

이스라엘에는 일곱 개의 중요한 절기가 있었다. 이 절기들은 한국의 설날과 추석처럼 단순한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을 기념하는 신성한 행사였다.

봄 절기 (1월)

  • 유월절(14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
  • 무교절(15일부터 일주일):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정결함을 상징

초여름 절기

  • 초실절: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날짜 불정)
  • 오순절: 초실절 50일 후, 곡식 추수를 감사하는 날

가을 절기 (8월)

  • 나팔절(1일): 새해를 알리는 나팔을 부는 날
  • 속죄일(10일):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가장 거룩한 날
  • 초막절(15일부터 일주일): 광야 생활을 기념하여 초막을 짓고 거하는 날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일 년에 세 번, 이 절기 기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권한 것이다.

배우지 않은 자가 어떻게 글을 알까?

명절 중간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여기서 ‘글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읽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성경책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가르치셨다는 의미였다.

당시에는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을 사용했는데, 예수님이 몇 개의 두루마리를 들고 성경으로 가르치셨던 것 같다. 당시에는 가말리엘 같은 유명한 랍비들 밑에서 정식으로 학문을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나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정식 교육을 받지 않으셨는데도 성경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유였다. 사람들의 놀라움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은 이어서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사람들과 논쟁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 논쟁의 배경에는 요한복음 5장의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겨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할례는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행해야 했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어도 할례를 행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든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논리였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초막절의 특별한 의미

초막절에는 다른 절기와 구별되는 특별한 규정이 있었다. 신명기 31장에 따르면, 7년마다 한 번씩 초막절에 모세의 율법을 성전에서 낭독하도록 되어 있었다.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이 규정은 단순히 의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율법을 듣고 배우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한 그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부터 바벨론 포로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초막절 자체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떠돌아다닐 때의 어려움을 기억하며, 나뭇가지로 임시 거처인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는 절기였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이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이 규정이 처음으로 실행된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느헤미야 시대였다. 느헤미야 8장에는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했다. 무려 천 년 가까이 지켜지지 않았던 규정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실행된 것이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예수님이 초막절에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가르치신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막절은 본래 율법을 낭독하고 가르치는 절기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절기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율법이 가리키는 참된 그리스도임을 보이고자 하셨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깨달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이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1 명절 초기의 반응

명절이 시작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수근거릴 뿐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현하지 못했다.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좋은 사람이다” vs “백성을 미혹하는 자다.”

2 명절 중간의 반응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사람들은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혹시 그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곧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이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올 때는 어디서 오는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다.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출생지가 명확히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 명절 말기의 세 가지 의견

예수님이 두 차례에 걸쳐 큰 소리로 외쳐 가르치신 후, 사람들의 의견은 세 가지로 분화되었다.

첫 번째 의견: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이는 신명기 18장에서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가리킨다.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예언했던 그 선지자 말이다.

두 번째 의견: “그리스도라” 이들은 예수님이 바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확신했다.

세 번째 의견: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세 번째 의견이 가장 흥미롭다. 이들의 주장은 구약 성경에 정확히 근거한 것이었다. 미가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고, 사무엘하 7장에는 다윗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었다.

4 베들레헴 출생을 말하지 않으신 이유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예수님은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헤롯이 유아들을 학살하려 하자 이집트로 피난을 갔고,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가서 자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나는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너희 주장이 맞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이것만 설명하면 세 번째 그룹의 반대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요한복음의 독특함이 여기에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베들레헴 출생 이야기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요한복음의 초점은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들레헴 출생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핵심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답답해하시며 큰 소리로 외치신 말씀이 오늘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여기서 ‘외쳐 이르시되’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14절에서는 단순히 ‘가르치시니’라고 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는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이 큰 소리로 선언하신 것이다.

5 예수님 선언의 의미

예수님의 이 선언에는 여러 층의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맞았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하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출생과 사명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더 높은 차원의 계획과 목적이 있었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ㅇ지 못하나” 예수님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참으로 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셨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서 났고”라는 표현은 단순한 출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이 원래 누구인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고 선언했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며, 동시에 특정한 시점에 아버지의 사명을 받아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이것이 베들레헴 출생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예수님의 정체성이었다. 베들레헴 출생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자격을 보여주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원자가 되실 자격을 보여준다.

성경 해석의 올바른 기준

예수님의 이 선언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유대인들도 성경을 인용했고, 그들의 인용 자체는 정확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틀렸다. 왜 그럴까?

1 욥기의 교훈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기의 교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기에서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그들이 인용한 내용들도 대부분 성경적으로 옳은 말들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많은 명구들이 실제로는 욥의 세 친구들이 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최종 판단은 어떠했는가?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세 친구들이 한 말이 성경적 근거가 없어서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말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가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방향과 의도였다.

욥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2 관점과 대상의 중요성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 어떤 관점에서 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욥이 세 친구와 논쟁할 때는 욥이 옳았다. 세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려 할 때,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달랐다. 하나님과 비교할 때 욥은 자신이 무지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과 비교할 때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고백했다.

3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기

예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성경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했다.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에 대해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즉, 말만 듣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한 일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 가르치신 말씀들, 보여주신 삶을 종합적으로 볼 때 그분이 누구신지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출신지나 학력 같은 외적 조건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4 성경 해석의 올바른 자세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도 적용된다. 성경의 개별 구절들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구절들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맥락에서 기록되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또한 성경 전체의 일관된 메시지와 조화를 이루는지,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부합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하지만 그 의도는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였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면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초막절 마지막 날의 성령 선언

명절 마지막 날, 예수님은 또 다시 큰 소리로 외치며 새로운 선언을 하셨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기자는 친절하게 이 말씀이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는 부연 설명도 했다.

1 성령과 생수의 관계

예수님이 성령을 ‘생수’에 비유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장에서는 개인이 받는 ‘샘물’에 비유하셨다면, 7장에서는 ‘생수의 강’이라는 더 큰 규모의 표현을 사용하셨다. 또한 4장에서는 ‘그 속에서 솟아나는’ 것이었다면, 7장에서는 ‘그 배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2 왜 초막절에 성령 이야기를?

성령은 보통 오순절과 연결해서 생각한다.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이 120명의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오순절을 예고했다.

그런데 왜 초막절에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을까? 이것은 구약의 예언과 연결되어 있다.

스가랴서의 예언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에스겔서의 환상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에스겔은 환상 중에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점점 깊어지며 강을 이루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물고기들이 살아나고,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죽은 바다가 살아나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3 개인과 공동체의 성령 역사

예수님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셨을 때, ‘그’는 단수형이다. 하지만 39절에서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복수형으로 설명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성령의 역사는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통해 ‘강’처럼 흘러나간다는 의미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려온 것은 그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온 세상으로 흘러나갈 시작점이었다. 초막절에 이 예언을 하신 것은 언젠가 성령의 충만함이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생수의 강처럼 넘쳐흘러 온 세상을 적실 것을 내다보신 것이다.

구약의 예언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신약의 진리와 연결된다. 바울 사도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 장소적으로는 구약의 예언이 가리키는 그곳에서, 시간적으로는 절기의 절정에서,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성전과 생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

현재 중동 지역,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성경의 예언과 무관하지 않다. 2024년 4월 14일에는 이란이 예루살렘에 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의 암호명이 ‘알 아크사의 홍수’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알 아크사는 현재 예루살렘 성전 터에 세워진 이슬람 모스크의 이름이다. 이 갈등이 확전되어 알 아크사 사원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다시 유대인의 성전이 세워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에 따르면 예루살렘에는 다시 성전이 세워질 것이다. 에스겔이 본 환상의 성전 이전에 또 다른 성전이 먼저 세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세워지면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가 모두 회복될 것이다. 현재는 성전이 없어서 제사와 관련된 절기들을 온전히 지킬 수 없지만, 성전이 재건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초막절에는 신명기 31장의 규정에 따라 7년마다 율법을 낭독하는 일도 회복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요한복음 7장을 읽는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실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초막절을 지키며 모세의 율법을 읽는 그 자리에서, 과거에 예수님이 바로 그곳에서 “내가 그에게서 났고”라고 선언하셨던 말씀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에스겔서에 기록된 미래의 성전에서는 일곱 절기 중 일부만 지켜진다. 초실절과 오순절은 없고, 유월절과 초막절만 지켜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절기들이 각각 다른 의미와 성취 시점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현재 우리는 오순절의 성취(성령 강림) 이후, 초막절의 완전한 성취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유월절과 무교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됨
  • 초실절: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됨
  •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됨
  •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미래에 성취될 예언

예수님이 초막절에 약속하신 “생수의 강”은 단순히 개인의 영적 체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온 세상으로 흘러나갈 성령의 역사를 가리킨다.

오순절에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정말로 에스겔이 본 환상처럼, 성령의 역사가 강물처럼 온 땅을 덮어 생명을 소생시킬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도 성취될 것이다.

결론

요한복음 7장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룬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하려 했다.

  • 출신지: 갈릴리 나사렛 출신
  • 가족 배경: 요셉의 아들
  • 교육 배경: 정식 랍비 교육을 받지 않음
  • 사회적 지위: 특별한 지위 없음

이런 외적 조건들로는 예수님이 진짜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조차 그분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정체성의 핵심은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었다. 베들레헴 출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가른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신학적 논리가 정교해도, 이 핵심을 놓치면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으로 알려면 성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실 것이다. 성령이 없이는 “예수는 주시라”고 고백할 수 없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공의로운 판단”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신앙을 판단할 때,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가?

  • 외모나 조건으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본질을 보는가?
  • 편견과 선입견으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열린 마음으로 들여다보는가?
  • 부분적 지식으로 성급히 결론내리는가, 아니면 전체적 맥락을 고려하는가?

예수님이 요구하신 공의로운 판단은 단순히 공정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판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판단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령을 받고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수의 강”의 완전한 성취는 아직 미래에 있다. 언젠가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강물처럼 온 세상으로 흘러나가, 모든 민족과 나라와 방언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7장의 메시지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예수님은 여전히 “내가 그에게서 났고”라고 선언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그분을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그날을 약속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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